경주와 이스탄불, 시간을 잇는 두 도시의 이야기
한국의 고도(古都) 경주와 튀르키예의 심장 이스탄불. 얼핏 보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두 도시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역사와 문화의 흐름 속에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천년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경주와 동서양 문명을 잇는 이스탄불은 모두 한때 찬란했던 제국의 중심지였고, 오늘날에도 그 유산을 간직한 채 세계인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두 도시 간의 교류 가능성이 주목받으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제국의 영광을 품은 도시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약 1,000년 동안 동아시아의 정치,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7세기 통일신라 시기, 경주는 불교 예술과 건축의 꽃을 피우며 동방의 보물창고로 불렸다. 석굴암과 불국사, 첨성대 같은 유산은 당시 신라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반면 이스탄불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시작해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약 1,600년간 이어진 역사를 자랑한다. 아야 소피아와 톱카프 궁전은 동서양이 만나는 도시의 상징으로, 경주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영광을 간직한 흔적이다.
두 도시는 모두 제국의 수도로서 권력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점에서 닮았다. 경주가 신라의 황금기를 이끌었다면, 이스탄불은 로마와 오스만의 황제들이 세계를 호령하던 무대였다. 이런 공통점은 두 도시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역사적 무게를 지닌 공간임을 말해준다. 전문가들은 “경주와 이스탄불은 과거의 영광을 현대에 되살려내며, 인류 문명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크로드를 통한 간접적 연결

실크로드 낙타 행렬
직접적인 교류 기록은 없지만, 경주와 이스탄불은 실크로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신라 시기 경주는 중국 당나라와 활발히 교역하며 실크로드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았다. 9세기 아랍 상인들이 신라의 금과 비단을 언급한 기록은 당시 경주가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스탄불,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실크로드의 서쪽 허브였다. 동양의 물산이 비잔티움 제국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가는 길목에서 이스탄불은 문화와 무역의 교차점으로 번성했다.
이러한 간접 연결은 두 도시가 서로 다른 대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세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경주의 금관과 이스탄불의 비잔티움 모자이크는 서로 다른 스타일이지만, 황금과 예술을 중시했던 공통된 미감을 엿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실크로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문화를 융합시키는 통로였다”며, “경주와 이스탄불은 이 흐름 속에서 각자의 빛을 발했다”고 설명한다.
튀르키예의 전통 치유법, 하맘과 경주의 공통점

터키 전통 목욕탕 하맘(Hamam)
튀르키예의 전통 문화를 이야기할 때 하맘(Hamam)은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이스탄불을 비롯한 튀르키예 곳곳에서 사랑받는 하맘은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목욕 문화로, 뜨거운 증기와 물을 활용해 몸을 이완시키는 공간이다. 여기에 더해진 부드러운 거품 마사지는 피로를 풀고 피부를 정화하는 핵심 과정으로, 단순한 목욕 이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뜨거운 대리석 위에서 진행되는 이 전통적인 마사지는 근육을 풀어주며 여행객들에게 깊은 휴식을 안긴다. 흥미롭게도 경주에도 신라 시절 온천을 활용한 치유 문화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불교의 정화 의식과 맞물린 신라의 온천은 하맘과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며, 두 도시가 물과 치유를 중시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하맘은 현대적 스파로 진화하며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경주의 온천 문화와 결합한 교류 프로그램이 현실화된다면 두 도시의 전통이 새로운 빛을 발할지도 모른다.
현대적 교류의 첫걸음
최근 들어 두 도시 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2023년 경주시는 튀르키예와의 문화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하며 이스탄불을 주요 파트너로 언급했다. 특히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와 이스탄불의 국제 행사를 연계해 양 도시의 유산을 알리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해 튀르키예 대사관 관계자가 경주를 방문해 불국사와 동궁을 둘러본 뒤 “이스탄불과 경주는 고대 문명의 공통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며 교류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관광 분야에서도 협력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경주는 신라의 유적과 한옥 마을로,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역사 유산으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두 도시가 서로의 매력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인다면, 동아시아와 중동을 잇는 새로운 관광 루트가 탄생할 수도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스탄불과 협력해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도전과 미래
물론 두 도시 간 교류에는 넘어야 할 산도 있다. 지리적 거리와 언어 장벽, 그리고 문화적 차이는 현실적인 걸림돌이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이런 한계를 극복할 기회를 제공한다. 가상 현실(VR)을 활용한 경주와 이스탄불의 유산 탐방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세미나를 통한 학술 교류는 시작점으로 충분하다. 또한 한국과 튀르키예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맺어온 우호 관계는 두 도시 간 협력의 든든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경주와 이스탄불은 단순히 과거를 간직한 도시가 아니라, 그 유산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데 강점을 지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경주의 신라 밀레니엄 파크와 이스탄불의 현대 박물관들은 전통과 혁신을 조화시키는 사례로 꼽힌다. 이런 공통점을 살려 양 도시가 힘을 합친다면, 세계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맺음말
경주와 이스탄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인류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도시다. 신라의 찬란한 유산을 품은 경주와 동서양의 경계에서 빛나는 이스탄불은 서로를 거울 삼아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아직은 작은 물결에 불과한 두 도시의 관계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커질지 주목된다. 역사 애호가든, 여행을 사랑하는 이든, 경주와 이스탄불의 만남은 새로운 영감을 줄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이번 봄, 경주를 찾는다면 이스탄불의 바람을 떠올리며 두 도시의 공통된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기사 작성: 고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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